곡성의 인물



신숭겸 마천목 유팽노 정운창 정재건 둔산 삼의사 허 섬 신정백 노임수 양원모 신태윤 심민겸 박언배 심민각 김용명

임란때 혁혁한 공훈을 세운 두암 심민겸

유비무환 십만양병 국방강화를 도외시하고 오로지 사색당론에 세력부식에만 급급한 조정 신하들은 국가를 업고, 임금을 업고 자기세력만 부식하려는 욕심에서 어떠한 수단을 써서든지 세력있는 상대방을 죽이고 귀양보내고 싸움만 거듭하였으니 사화만도 12사화나 되어 무고히 희생된자가 수천명을 헤아리니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국가도 도외시하고 민족도 도외시하고 오직 "나" 하나만 살면 그뿐이라는 가장 밉상스러운 생각은 국가민족을 가장 위태로운 지경에 빠트리게 하였으니 저 치욕스런 임진왜란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불과 한달 남짓하여 삼천리 금수강산을 짓밟았으니 어찌하느냔 말이다. 국내사정도 모르거니와 국제사정에 특히 일본사정에도 어두워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위정객들이니 참으로 한심할 노릇이다.
정세무지 무방비상태 무사안일 군비부족 전략부족에 어찌 강적을 당할 수 있을까. 위정자는 국록을 먹고 국사를 그르치니 그 죄 크도다 반성할찌니라.
그러나 보라 재야에 있는 우국지사를 보라 그래도 사람은 있으니 삼천리 방방곡곡에 나라를 걱정하고 겨레를 걱정한 의병들이 우후죽순같이 일어나니 여기 곡성에서도 많은 의사들이 나와 왜병과 싸웠으니 그중에서도 곡성입면 두암 심민경은 그 혁혁한 무공을 세우신 분이시다.

두암은 어려서부터 담력이 있고 지용이 남달리 하였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경사를 다 읽고나서 "평생에 배울바는 충과 효뿐이다"라고 하였다.
나이 20세에 임진왜란을 당하니 그 충의 마음과 강개의 마음은 의병을 모집하고 권률원진의 막하로 가서 수원에 주둔하고 군량운반의 중책으로 전쟁을 승전으로 이끌었으며 역시 먹지 않고서는 싸울수 없는 것이다. 군사들의 젖줄을 보급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가 안 먹으면 못싸운다.
특히 권원수가 고향땅 행주산성 싸움에서 크게 이긴것도 군량으 보급을 잘 하였기에 크게 이겼던 것이다. 또 다시 남원성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으니 저 유명한 남한산성을 쌓을때에 많은 역군들을 데리고 가서 성을 쌓았으며 8월달 남원성이 함락될 때 고군으로서 역전분투 하였다.
그후 이괄란때에도 특히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주부 홍우익 전만호 원성홍과 같이 의병을 거느리고 공주로 가는 도중에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두암의 충성을 길이 추모하기 위하여 나주 충장사 곡성 두암사에 모시고 제향을 지낸다.
길이길이 두암정신을 받들어 거룩하심을 높이 길이 추모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