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의 인물



신숭겸 마천목 유팽노 정운창 정재건 둔산 삼의사 허 섬 신정백 노임수 양원모 신태윤 심민겸 박언배 심민각 김용명

호가공신으로 괄란을 치룬 구암 심민각

병자란에 거의한 문무겸전 하신 분

이괄 란이라고 하면 군내란으로 1622년 인조반정때 포악군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 종을 추대하니 곧 인조라 우리나라에 포악군으로써 연산군 광해군이 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두분이 다 처음에는 정치를 잘하여 내치 외치에 그 치적이 많았었다.
그러다가 보필한 간신의 탓도 있지만 너무나 욕심이 많아서 도에 넘치고 선에 넘치는 행동이 많아 임금으로서의 자격을 잃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쫓김을 받았던 것이다. 여기서 김 유, 이 귀, 심귀원, 최명길, 김자점, 신경인, 이 괄, 등의 거사로 능양군 종을 옹립하였으니 이분이 인조이시다.
인조반정후에 집권당이 분열을 보이고 있을 때 1624년 정월달에 이 괄란이 일어났다.
반정후 노공행상에 불평을 품었으니 평안병사겸 부원수가 되니 더욱 불평이 커져 이윽고 따뜻을 품게되었다. 그리하여 정월 22일을 기하여 거병하니 인조는 남천하고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 괄이 패전되어 인조는 22일 공주에서 환도하였다. 이때 구암 심민각은 집안식구며 의병 900여명을 거느리고 운봉현감 황 일호 여산부사 송질과 같이 천안에서 역로에 진을 치고 대가를 맞이하니 때의 좌방의사 학성군 김완을 여기서 만나니 사전에 약속하였던 것이다.
영원군 고홍건 부제학 신천익 좌층지성가고 병판 박성오 목사 이흥록 판결사 송근필등과 같이 호가공신이 되었다.
그후에 또 병자호란때에도 의병을 거느리고 호서를 지키다가 강화가 이루어지니 벼슬을 버리고 호정에 물러나 구암조대에 낚시를 드리우고 여생을 보냈으며 그후 구암사에 배향 하였다.
이 구암정신을 높이 받들어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길이 숭모하여야겠다.